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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용감한형사들2

용감한 형사들2 앙드레 김 협박 사건과 그의 생애

by 영화좋아합니다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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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인생 이야기와 그가 당했던 협박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000년 3월, 앙드레 김은 익명의 협박범으로부터 38 구경 권총과 2억 9천만 원을 요구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경찰의 수사는 추적이 불가능한 권총과 함께 발견된 편지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범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목차

1. 앙드레 김의 디자인 업적
     한국 디자인계를 이끈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앙드레 김의 대표작품과 그의 디자인 철학


2. 앙드레 김의 인생 이야기
    태어난 곳과 어린 시절
    디자이너가 되기까지의 과정
    해외에서 활동하며 겪은 어려움과 성공
    한국에 돌아와서의 새로운 시작


3. 2000년 협박 사건
    익명의 협박범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요구 사항
    경찰의 수사와 범인 추적의 실패
    앙드레 김의 이후 인생에 미친 영향


4. 결론
    앙드레 김의 디자인 업적과 인생 이야기, 그리고 협박 사건이 미치는 의미와 영향

 

 

 

내용

출처 E채널

1.

오늘의 사건은 범행 대상의 이름을 듣는 순간 너무 놀란 사건이다. 때는 2000년 3월 22일, 오전 11시경 경찰청에서 강남경찰서로 전화를 한다. 강남의 한 의살실에 위험한 물건이 배달되는데 은밀히 수사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특이한 것은 제보 전화도 아니고 경찰청에서 경찰서로 수사를 지시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의상실 관계자는 전날 오후 3시 퀵서비스로 발신자가 없는 택배를 받았고 그 안에는 38 구경 리볼버 권총과 실탄 9발이 들어있었다. 한국은 총기 소지가 불법인 나라로 이 자체는 불법이다. 이 총은 경찰이 사용하는 기종과 동일했고 일련번호가 일부 지워진 상태였다.

 

퀵서비스의 업체 정보는 찾을 수 없었고 근처 cctv도 있지 않아 당장의 추적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택배 박스 안에는 범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 한 통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내용물을 보시고 다소 놀랐으리라 생각됩니다.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을 먼저 밝힙니다. 요구사항은 만 원권으로 2억 9천만 원을 가방 3개에 담아서 25일 오후 3시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있는 냉면 집 주차장으로 가져오십시오. 만약 경찰에 알리거나,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선생님과 아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2.

애매한 금액과 위치, 그리고 협박 편지임에도 존경한다는 인사까지. 여러모로 이상한 내용이었다. 협박 편지를 받은 대상은 디자이너 앙드레김이었다. 앙드레김은 이전에도 협박을 받은 사례가 있었지만 총을 택배로 받은 건 처음이었다. 수사가 확대되는 걸 원치 않은 신고자를 위해 경찰은 최소 인원만 투입하며 보안을 유지하여 수사하기로 한다.

 

하지만 평소 인품으로 봤을 때 원한을 살만한 대상은 없었기에 두려움은 매우 텄다. 경찰과 앙드레김은 총 이상의 다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편지에 추가로 기입된 내용은 '나는 큰 조직의 일원으로 여분의 총이 있으니 허튼짓 하지 말아라'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경찰청 감식 결과 6개의 지문이 나왔으나 모두 앙드레김 의상실 직원들의 것으로 확인 되었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봤을 때는 돈을 전달하는 시점에서 범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3.

범인이 말한 시점은 신고일로부터 4일 후였다. 경찰은 회의 결과 1만원권으로 1억만 준비를 하고 그다음 추적을 노리자는 것이었다. 당시 1억 원은 A4용지를 잘라서 용지와 동일하게 만들고 보이는 표면적인 부분만 1만 원권으로 덮었다. 전형적인 영화 촬영에서 쓰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돈다발을 넣은 가방에 의상실 실장의 명함을 함께 넣었다.

 

4.

대검찰청 앞은 왕복 8차선으로 굉장히 넓은 구역이라 강력팀 팀원 전체가 출동하였고 퀵 서비스 기사 4명까지 추가로 섭외가 된 상태였다. 모든 상황에서 기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5.

접선 일 오후 3시, 의상실 실장은 돈 가방을 들고 접선장소에서 대기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까만색 suv 차량이 앞에 서고 그 차량에서는 2명의 남성이 내리고 남성 두명은 그 가방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경찰은 총기 소지 가능성을 생각했고 대로변인 특성상 추가 피해 방지를 위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미행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은 매장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용은 경찰에 알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만 하고 통화를 끝냈고 경찰은 통신사에 발신 요청을 했지만 범인이 사용한 폰은 선불폰으로 명의자를 찾기에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번호판을 조회한 결과 렌터카로 확인되었고 업체에서는 5시에 반납이 약속되어 있다고 했다. 경찰은 한시가 급했다. 렌터카 업체가 있는 경기도 구리로 향했고 다행히 범인보다 일찍 도착했다. 

 

6.

그리고 차량을 반납하러 온 범인들과 만났고 차량 반납을 위해 온 남성 2명은 아무것도 모르고 단순히 심부름을 한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전 사우나에서 만난 사람이 가방만 옮겨주면 2천5백만 원을 준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그 말도 믿을 수 없었고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남성 2명을 체포한 뒤 통화내역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독 오래 그리고 자주 통화한 번호를 추적했다.

 

7.

번호는 광주에 사는 한씨였다. 한 씨의 직업은 외항선원이었다. 당시 외항선원은 입국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서 간혹 악용하여 총기, 마약, 사치품 등을 밀반입하는 경우도 잦았다. 경찰은 탐문수사로 한 씨의 집으로 향했고 집 앞에서 잠복 중이었다. 그리고 잠복 중에 한 씨 부모님을 만나고 한 씨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혹시 이것 때문에 왔냐며 007 가방을 경찰에게 보여줬다. 그 가방 안에는 38 구경 리볼버 두 자루와 총알 56발이 담겨 있었다. 그 가방은 한 씨가 애지중지했던 가방이었다고 한다. 

 

8. 

한씨 부모님은 경찰이 보는 앞에서 아들에게 전화를 했고 경찰은 상황 설명을 전한 뒤 강남경찰서로 자수를 권했다. 그리고 한 씨는 강남경찰서로 향했고 한 씨는 검거되었다.

 

9. 

당시 뉴스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앙드레 김은 단순히 비싼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돈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협박했다는 것이였다.것이었다. 그리고 신문 도중 알게 된 내용은 이미 다음 범행대상까지 물색했다는 것이었다. 다음 대상은 재벌 총수, 정치인들이었다. 

 

10.

한씨는 선박회사 일등항해사로 전과는 없었지만 고된 항해생활로 사업을 원했고 사업 자금 마련을 범행을 모색했다는 것이었다. 범행을 결심한 한 씨는 브라질에서 총 세 자루와 총알 70발을 구입해 입국했고 한 달 만에 범행을 시도한 것이다. 

 

11.

재판 결과 한씨는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운반책 2명은 징역 1년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세 명 모두 1년 6개월 이하의 형량으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앙드레김은 누구인가

출처 앙드레 김 아뜰리에

 

인물 설명

본명 : 김봉남

출생 : 1935년 9월 21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사망 : 2010년 8월 12일 (향년 74세)

국적 : 대한민국

신체 : 178cm

자녀 : 아들 김종도

학력 : 서울신도초등학교, 고양중학교, 한영고등학교, 국제복장학원

종교 : 불교

브랜드 : André Kim

 

출처 위키백과

생애

앙드레 김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어린 시절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부터 미술에 빠져들게 되었고, 한국 전쟁 시절에 부산에 피난을 가면서 극장에서 외국 영화를 보면서 패션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된다. 본래는 배우가 되기를 원했지만, 국내에서는 예술적인 패션을 가르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 책을 통해 독학을 하다가 국제 복장학원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를 열고 우리나라 남성 디자이너 1호가 되었다.

 

 

앙드레 김은 해외에서 활동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간 1960년대 후반에는 아직 한국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지 않았기 때문에 고객을 찾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또한, 현지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여 언어 장벽으로 인해 거래를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서 디자인 관련 교육을 받고, 현지 디자인 업계와의 교류를 통해 미국의 디자인 시장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디자인은 미국의 유명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업적

앙드레 김은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라는 호칭에 대해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자신이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을 때, 한국에서는 패션 디자인을 전공할 수 있는 대학이 없었고, 패션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매우 적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앙드레 김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독학으로 패션 디자인을 배워나가며 성장한 것이기에, 자신이 이룩한 성과는 자신의 노력과 열정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앙드레 김은 자신을 "패션 디자이너"로 불러주길 바랐습니다.

 

앙드레 김은 한국 패션계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흰색에 대한 집착과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의 작업실에는 일반인들도 입을 만한 옷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실용성 또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앙드레 김은 지나친 아방가르드는 싫어하는 등 과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앙드레 김은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로, 한국 패션계를 이끄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망

협박 사건 이후 깊은 우울감과 불안감을 겪기도 했고, 그의 건강도 악화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대규모 패션쇼에서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으며,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큰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2010년 8월 12일, 74세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디자인 업적과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별세로 인해 대한민국 패션계는 큰 상실을 겪었다. 사후에는 최고 등급의 문화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되었다. 앙드레 김은 말년에 거동이 불편해져서 신사동의 자신의 의상실로 출근할 때 주변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이 2명이나 붙을 정도였으며, TV에서는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앙드레 김은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장례식도 불교식으로 치러졌으며, 그의 묘지는 천안공원묘원에 위치해 있다. 모델 박영선은 TV조선의 프로그램 '인생다큐-마이웨이'에 출연했을 때 앙드레 김의 묘소를 찾는 모습이 방송되기도 하였다.

 

 

 

출처

 

 

용감한 형사들2

 

www.imtca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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