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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3월 16일 70화 슬프고도 처절했던 나의 변호사 조영래

by 영화좋아합니다 2023.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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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m-movie.com

 
 

내용

1. 

86년 어느 날, 인숙 씨는 쉬는 날 방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남자가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인숙을 연행된다. 인숙이 연행된 곳은 부천 경찰서. 경찰은 인숙의 방에서 찾아낸 이력서와 주민등록증을 건네며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하라고 한다. 
 
주민등록증 사진은 인숙이지만 이름은 김현숙으로 적혀 있었다. 인숙은 주민번호, 이름, 학력, 주소 모두 가짜였다. 타인의 신분이었다. 당시 정부의 위장 취업자들에 대한 경계심은 극에 달했던 시기로 인숙의 강도높은 조사가 예상되었다.

인숙의 진짜 학력은 중졸이 아닌 서울대학교 중퇴자였다. 인숙은 공장에 취직을 하기 위해 신분을 낮춰 속인 것이다.
 

2. 

인숙은 운동권 학생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인권운동이 활발했던 70~80년대, 학생 신분을 버리고 직접 노동 현장에 뛰어든 운동권 학생들이 많았다. 인숙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운동권 학생들의 노동 현장 진입의 목적은 노동자를 위한 야학 운영 및 노동조합 설립이었다. 당시 위장취업자는=일명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어지던 시대였다.
 
위장취업의 죄목은 사문서, 공문서 위조였다. 인숙은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지만 다음 날부터 경찰의 심문 강도는 강해졌다. 인숙의 강도 높은 조사 목적은 운돈권 학생들을 잡아들이는 것이였다. 경찰은 인숙에게 함께 활동했던 선배와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는 했고 이는 인숙을 미끼로 윗선을 밝혀내기 위함이 보였다. 당시는 86년으로 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기 1년 전으로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퍼진 민주화의 함성이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인숙이 체포되기 한 달 전, 인천에서 5.3 사태가 벌어진 직후였고 당시 전두환 정권은 주동자 검거 시 특진, 표창 등 포상을 내거는 등 5.3 사태 핵심 인물들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숙이 그 시기에 체포된 것이다. 경찰들은 5.3 사태 핵심인물을 인숙의 입을 통해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 

경찰보호서에 갇힌지 3일째 되는 날 새벽 인숙을 불러낸다. 당시 경찰서장은 경장 문귀동에게 인숙 자백을 지시한다. 문경장은 인상이 좋지 않았다. 문경장은 인숙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며 간첩도 본인 앞에서는 자백을 한다면서 5.3 사태의 주동자와 관련자를 발설하라며 협박한다. 인숙은 예상했다. 문귀동은 성적 수치심을 주는 모욕적인 언사로 자백을 받아내는 경찰일 것이라는 것을.

인숙이 말을 하지 않으니 젊은 경찰을 불러 고춧가루와 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놀란 인숙은 겁에 질려 생각나는 아무 이름이나 말했다. 문귀동의 태도는 유해졌고 인숙은 다시 보호서로 이동하게 된다.
 

4. 

다음날 인숙의 거짓말은 들통이 나고 조사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수사계장은 문귀동에게 대놓고 성고문을 지시한다. 그날 오후부터 무릎을 꿇리고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워 앉히고 사진을 보여주고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무릎을 각목으로 내리친다. 그리고 반복되는 질문에도 인숙이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자 문귀동은 인숙을 본인의 조사실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다. 혹시 모를 뒤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인숙은 아버지는 식당을 하신다고 말했지만 인숙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인숙은 아버지에게 불이익이 갈까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 대답을 들은 문귀동 입가에 웃음이 퍼진다.
 

5. 

당시 사건의 끔찍한 상황은 인숙의 자서전인 '하나의 벽을 넘어서'에 구체적으로 기입했다. 인숙은 앉아있을 수 없을 정도의 뒤틀림으로 며칠을 보냈고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을 낙인같은 상처를 받았다. 당시 경찰은 똑같았다. 공권력을 이용해 성폭력을 고문수단으로 사용했다. 
 

6. 

인숙은 다짐했다. 성고문을 묵인하지 않고 세상에 발설하기로. 침묵하면 이 처참한 짓은 누군가에게 되풀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가족의 안위까지도 우려해야 되는 상황이었지만 다음 희생을 막기 위해 최선의 방법이었다. 
 
인숙은 당시 공문서 위조로 입건된 상태였고 변호사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숙은 이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변호사뿐이었다. 그 변호사는 조영래였다.
 
인숙의 조영래 변호사의 첫인상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 엉성하게 맨 넥타이, 낡디 낡은 구두로 의심이 가득했다. 
 

7. 

조영래 변호사는 어렸을 때부터 문제아 중에 문제아였다. 고등학생 시절인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서울대학교 법대 전체 수석입학을 했다. 하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당시 합격 인터뷰에서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당시 3~4년 소요되는 사법고시도 1년 만에 합격한다.
 
하지만 조영래 변호사가 변호하는 사람들은 오직 거대 권력과 맞서는 소시민들이였다. 약자의 편에서 큰 힘이 되어주는 변호사였다. 망원동 수재 사건, 대우어패럴(구로 동맹 파업) 사건, 진폐증 박길래 사건이었다.
 
인숙의 사건을 변호하기 전 조영래 변호사의 직전 사건은 23세 직장인 여성 사건이었다. 여성은 횡단보도를 건너다 택시에 치이게 되고 그로 인해 원치 않는 퇴사를 하게 되고 여성은 택시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했다. 법원의 판결은 '여성의 정년은 25세'라는 판결을 받았다. 여성은 보통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두기에 그것이 정년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래서 2년 치 수입만 배상받으라는 판결이었다. 조영래 변호사는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동일하게 55세라는 판결을 얻어낸다. 그런 조영래 변호사의 수임료는 0원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 사건은 여성의 권익 전체를 대변하는 공익 사건이므로 무료라는 말이다. 
 

8. 

이런 조영래 변호사는 인숙을 변호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인숙은 문귀동을 강제추행 협의로 고소한다. 변호인단은 조영해 변호사를 포함해 총 9명으로 검찰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성고문을 지시한 경찰서장도 함께 고발하며 5공 정권과 정면 대결을 신청한 것이다. 
 

9. 

인숙은 포승줄에 묶인 채 검찰과 경찰서를 오가며 피해자 조사를 시작했고 힘들었지만 조사를 성실히 실행한다. 그리고 검찰에서 만난 대질신문에서 문귀동은 당당하게 성고문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거짓을 말하며 누명이라 주장한다. 그 거짓말은 문귀동뿐만 아니라 경찰서장과 문귀동 포함 모든 경찰들이 똑같이 부인한다. 이어서 인숙을 무고죄로 고소한다.
 
검찰은 인숙과 문귀동 중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경찰들의 증언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과 인숙의 진술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상황이 불리하니 경찰 중에 한 명이 자백을 한다.
 
하지만 얼마 후 검찰은 성고문은 없었다고 신문에 보도한다. 이어 공안은 인숙의 행동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신문 보도를 한다. 내용은 급진좌경노선을 신봉하는 행동대원으로서 목적관청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도 서슴지 않는 행태를 보이며 자신의 석방구명을 위해서라면 성고문 사실을 꾸몄다는 일명 빨갱이라고 대대적으로 신문 보도를 한다. 한마디로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면 빨갱이와 미친 사람으로 몰았다.
 
수사 결과 발표 직전 청와대, 안기부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하고 당시 청와대는 전두환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하며 수사 결과 발표를 지시한다. 당시 뉴스의 헤드라인과 보도지침은 40년이 지난 지금과 다르지 않게 모두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철저히 따랐다.
 
부천경찰서 사건은 정부가 철저히 통제와 조작하고 거짓 보도를 자행했다. 권력에 굴복한 검찰과 사건의 진상을 침묵한 언론. 
 

10.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조영해 변호사는 직접 손으로 알리고자 했다. 바로  조영래 변호사가 직접 손으로 작성한 고발장이었다. 작성한 고발장은 1장으로 출력해서 1만 장을 뿌렸다.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고발장을 읽고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고발장은 복사에 복사를 거쳐 전국적으로 퍼졌다. 범국민적인 일로 번졌다. 성고문을 자행하는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자며 국민들은 진실을 요구했고 경찰은 여전히 침묵했고 검찰에 불을 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11. 

조영래 변호사는 인숙의 용기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꾸준히 전달하였다. 
 
1986년 11월 21일 인숙의 공문서, 사문서 위조죄에 대한 결심공판이 이루어지는 날, 언론과 세상은 인숙에 주목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겁도 힘들었던 인숙. 방청석에는 몇 달 사이 머리가 희게 센 부모님이 보였다. 
 

12. 

조영래 변호사는 최후의 변론을 한다. 경찰은 의도적으로 인숙을 권양이라고 지칭하며 왜 그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지 우리가 사회가 어린 그녀에게 무엇을 자행하고 외면했는지 이야기를 한다. 죄의 소명을 설파하는 기존 변론서와 달랐다. 인숙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숙이 왜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왜 행동하였는지, 신분을 속여가면서 공장에 취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의 행동은 우리가 외면했던 우리의 몫이며 역할이라는 내용이었다. 
 
소신을 지킨 위로의 눈물이 흐른 인숙. 방청석의 사람들과 조영래 변호사도 눈물을 흘렸다. 재판의 결과는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된다. 공문서, 사문서 위조죄는 죄로 인정된 것이다. 1심에서 실형은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인숙이 감옥에 있는 동안 문귀동은 개인사업을 하면서 아주 잘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고 조영래 변호사는 가해자를 법정에 세워달라며 재정신청서를 작성했고 이름을 올린 변호사만 166명으로 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3.

그리고 독재 정권에 대항하며 거리로 나선 수많은 시민들, 성고문 사건으로 보도치 침이 폭로되었고 박정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1년 후인 1988년 문귀동은 구속된다. 사건 발생 1년 10개월 만에 문귀동이 법정에 선 것이다. 수의를 입은 문귀동과 사복을 입은 인숙. 상황은 역전되었다. 하지만 문귀동은 당당히 말한다. 겁은커녕 성고문한 사실은 없으며 치안본부장이 시킨 폭행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다고 거짓 증언을 한다. 그리고 본인은 상관의 지시로 죄를 뒤집어쓴 속죄양이라고 한다.
 
재판이 끝나고 문귀동을 태운 차량이 나가려는 순간 시민들은 문귀동이 탄 차량을 가로막고 차량을 부수며 문귀동 처벌을 요청했지만 문귀동은 경찰의 보호하에 안전했고 5년형을 받았다. 공권력을 이용한 범죄이므로 더 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반대였다.
 

14. 

아쉽지만 인숙은 진실을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세상에 나왔을 때도 나를 불신하는 시선이 있었지만 문귀동 판결 이후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처음 피해 사실을 털어놓은 순간부터 늘 인숙 씨 곁에는 조영래 변호사가 함께 있었다. 언론이 침묵했던 성고문 사건을 세에 알렸을 때도 부정한 권력을 상대로 싸워 끝내 승리했을 때도 조영해 변호사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 DP 조석봉 역할을 맡아 유명해진 배우 조현철의 백부는 조영래 변호사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매드크라운과 조현철의 큰아버지인 것이다.
 
 

출처

[3월 16일 예고] 슬프도록 처절했던 ‘나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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