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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3월 2일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경찰 '착혈귀'를 잡기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아들의 추적기

by 영화좋아합니다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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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2월 16일 66회 매국노가 낳은 애국 우장춘박사

전편 보기 꼬꼬무 65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월 8일 베트남 안희완 안병찬 개요 방송사 : SBS 방송 날짜 : 2021년 10월 21일 ~ 방송 시간 : 목요일 밤 10시 30분 ~ 12시 기획 : 최태환 연출 :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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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 

때는 1971년 8월 부산, 카스텔라 앞에 앉은 가족들. 아버지의 생일날이었다. 막내아들 상국이는 아버지의 생신이 3월인데 왜 8월에 축하파티를 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는 생일이 2개이다. 
 
1942년 부산, 어느 날 아버지 광우의 친구들은 작당모의를 하게 된다. 일본 놈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자는 것이다. 17세 광우는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한다. 친구들과 먼저 전단을 제작한다. '일본은 망한다, 조선독립만세'의 글귀였다. 당시 이런 글귀는 읽기만 해도 큰일이 나는 조선말기였다. 
 

2. 

다음 계획을 준비하던 그 때 광우는 경남 경찰부 고등경찰과 외세부로 끌려간다. 그리고 광우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악몽이 시작된다. 경찰이 원하는 대답을 놓을 때까지 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어린 광우는 고문을 자행했던 경찰의 이름을 잊을 수 없다. '하판락' 매일 하판락은 어린 광우의 전담 고문관이었다. 광우가 당한 고통은 시작에 불과했다.
 
고문당하는 어린 광우의 팔을 주사기로 찌르고 혈관이 잡히면 피를 뽑는다. 그리고 얼굴에 뿌린다. 그걸 고문받는 내내 반복한다. 그 고문의 이름은 착혈고문이다. 어린 광우가 받았던 고문의 기간은 10개월이다. 모진 고문으로 망가진 어린 광우는 재판을 받게 되고 재판의 결과는 단기 1년, 장기 3년 형에 처해진다. 그렇게 감옥에 갇혀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광복을 맞이하고 어린 광우는 2년 5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어린 광우의 두 번째 생일이 된다.
 

3. 

때는 1949년 8월 24일 오후 2시, 두사람은 재판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하판락은 피고인석에 증인석에는 이광우가 서있다. 재판관이 하판관에게 이광우를 아냐고 물으니 처음 본다며 고문 사실에 대해 부인한다. 광우는 증인석을 박차고 뛰쳐나가 그대로 하판락을 내리치며 말한다. 본인의 항일투쟁과 하판락의 친일행각, 고문방법을 진술한다. 증언을 들은 재판장은 제치하에서 큰일을 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반미특위가 다룬 사건 700여 건.
 

하지만 반미특위 초반부터 친일 세력의 공작은 상상을 초월한다. 풍부한 재정과 높은 사회적 위치로 여러 공작활동을 펼친다. 현재와 다르지 않게 민족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앞잡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한다. 친일파 청산은 민족 분열이다 민족분열은 공산주의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리고 이 작전은 광복 직후 이념대립과 멍청한 국민들로 인해 먹힌다. 청산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국민 및 국회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고문전문가인 노덕술을 치안기술자로 석방을 시켜 반민특위 조사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 하게 치안 프레임으로 덮는다. 친일파 청산의 큰 장벽은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4. 

1949년 6월 친일파들의 총공세가 이어진다.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미특위 습격, 김구 암살까지 그 후 반미특위는 서서히 사라졌다. 이전에 체포 되었던 700여 건의 사건들 중 처벌받았던 친일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어떤 심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면죄부를 받은 친일파들은 지위와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하판락도 다르지 않다. 국회에서 친일파들을 보호하는 법안이 발의되고 대통령조차 친일파를 감싸니 친일세력이 위세를 떨치는 세상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5. 

광우씨는 40년 만에 증인소환장과 죄소번호 패찰을 아들 상국 씨 앞에 꺼내둔다. 아버지는 독립유공자 신청을 원하고 아들 상국 씨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항일 증거를 찾아다닌 지 10년 후 예상치 못 한 곳에서 한줄기 희망을 발견한다. 하판락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 상국 씨는 하판락을 대면한다. 아버지에게 말로만 듣던 친일 경찰 하판락과 마주하게 된다. 광우 씨는 아버지가 아닌 하판락의 심복인 김소복의 이름은 언급한다. 그리고 친일경찰의 증언을 얻어낸다. 50년이 걸려 얻어낸 한마디였다. 상국 씨는 10년간 모은 자료와 하판락과의 대화를 담은 독립유공자 공적서를 보훈처에 제출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독유공자로 선정되셨다.
 

6.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신 것이다. 건국 훈장외에 참전용사증서도 보유 중이시다. 35년 간의 일제강점기와 1945년 8월 15일 광복, 1950년 6.25 전쟁까지 이광우애국지사의 삶은 과연 어떤 삶이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7. 

이 사건 이후 하판락은 전직 친일 경찰로 뉴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판락은 진주 하씨로 고향은 진주시 명석면이다.
하판락은 해방 후 모교인 진주고등학교 초대 동창회 감사를 지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으로 과거 우양신용금고를 설립하였고 목재사업을 병행하며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부산에서는 대한노인회 수영구 지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1999년 부산시장에게 어버이날 표창도 받으며 지역에서 지역에서 인정을 받는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치일파 708인 명단에도 들어갔고 그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다. 하판락은 천수를 누리다 2003년 9월 11일 91세로 사망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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