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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2월 16일 66회 매국노가 낳은 애국 우장춘박사

by 영화좋아합니다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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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65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월 8일 베트남 안희완 안병찬

개요 방송사 : SBS 방송 날짜 : 2021년 10월 21일 ~ 방송 시간 : 목요일 밤 10시 30분 ~ 12시 기획 : 최태환 연출 : 최삼호, 안윤태, 유혜승 출연 : 장도연, 장현성, 장성규 기획의도 sbs에서 방영되는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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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현의 한 작은 도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5살을 맞이하는 해였다.

얼마 전 친구가 근처로 이사를 와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가신 장춘의 아버지. 그날 저녁 골목이 소란스러웠다.

골목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친구를 만나러 간 우장춘의 아버지는 둔기에 맞은 듯 깨져있었고 목을 날카로운 칼날에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역은 뒤집혔고  경찰서는 뒤집혔다. 그리고 곧이어 경찰서에 들어온 두 명의 남성.

 

그는 우장춘의 아버지의 친구와 하인이었다. 경찰은 조선인이냐 물었고 아버지의 친구는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살해한 이유는 우장춘의 아버지가 왕비를 살해했으며 나는 조선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그 사건 중 몇몇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주도적이었던 인물 중 한 명이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이었다.

 

우범선은 1895년 당시, 조선 훈련대 대대장으로 시해사건 직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명성황후의 시신을 소각하기 시작했고 우범선도 그 일에 가담했다. 그 후 고종은 을미사변 가담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그 후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령을 하고 조용히 숨어 살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8년째 되던 해 친구에게 끔찍하게 살해를 당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날 이후 장춘은 하루아침에 조선의 역적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불평한 가족이 되었다. 당시 만삭이었던 엄마는 출산을 위해 장춘을 도쿄 사찰 고아원에 맡겨지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가 장춘을 데리러 왔고 가난했지만 엄마와 동생과 셋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학교에 입학한 장춘은 조선인의 자식이라며 따돌림과 폭력을 당했고 그 슬픔과 외로움을 민들레처럼 살아가라는 어머니 말씀에 위안을 삼으며 살아가기 시작한다. 

 

2. 

장춘을 공부를 잘했지만 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아 이공계 진학의 꿈을 이루기 힘들었지만 조선총독부에서 장학금 제의를 한다. 그것 조선총독부의 관비 유학생 제도=친일파 육성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고등교육은 받을 수 없었고 우장춘은 조선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인 차별을 받던 상황이라 장학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정해준 도쿄제국 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하게 된다. 정식 대학과정이 아닌 농업 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전문학교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정규생이 아닌 청강생에 불과했다. 실무보다는 짐을 들고 나르고 잡일만 하는 일을 주로 했고 많은 조선인들은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다.

 

3. 변곡점

그러던 어느 날 조선의 도지사가 일본에 왔다. 그는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들을 위한 연설을 위해 방문한 것이다. 하지만 우장춘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른 조선인 학생들은 얼굴이 빨개지고 강단 위로 뛰어올라 도지사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김철수였다. 도지사의 친일 발언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장춘은 김철수에게 물었다. 나는 조 선 이이요,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김철수는 다시 우장춘에게 말한다. 너는 조선인인데 왜 조선말을 못 하냐? 너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이냐?. 우장춘은 아버지의 이름이 우범선임을 말한다. 당시 김철수는 우범선이 면성왕후 시해에 가담한 자르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장춘에게 너의 아버지는 매국이며 역적이다, 아버지의 죄를 네가 속죄하고 반성하면서 살라며 고함을 쳤다. 그 후 장춘은 김철수에게 여러 번 찾아갔고 많은 이야기를 나웠다. 

 

4. 

6개월 후 우장춘은 국립 농사 시험장에 취업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9급 공무원급이다. 비록 봉급은 많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동생과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었다.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가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일본 여자를 소개를 시켜주고 결혼을 준비했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과 결혼은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와타나베 코하루는 친정과 의절을 하고 우장춘과의 결혼을 택한다. 한동안 행복했던 두 사람, 아내는 임신을 했고 우장춘은 아이에게 본인과 같은 차별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기에 아이에게 아내의 성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친정과 의절한 상태였기에 그럴 수도 없는 상태였다. 장춘을 잘 알던 일본인 지인이 장춘의 아내, 와타나베 코하루를 집에 양녀로 들이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내는 그 집의 성을 사용했고 장춘도 아내와 같이 스나가라는 성을 받게 되었다.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5.

농사 시험장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근무한 장춘, 그럼에도 장춘은 이곳에서도 차별을 받게 된다. 아무리 성과를 내도 인기가 많은 곡물부서에 발령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전문대 출신에 조선인이었던 우장춘은 비인기 부서인 식물부서에 머무르게 되었다. 세계의 회사들도 실패한 겹꽃 피튜니아 종자를 개발한 우장춘, 미국과 유럽에 불티나게 팔렸고 당시 금값의 무려 10배였다. 

 

6. 

논문 제출일 전날 밤, 농장의 불이 났다. 그 농장에는 장춘의 논문 결과의 모든 것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연구를 시작한다. 유채였다. 당시 유채는 호롱 불 기름으로 사용되었다. 병충해에 강한 종자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1936년 6월 4일, 38살의 나이로 농학 박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 박사 학위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유는 이론에 불가했던 오류를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무려 진화론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찰스 다윈은 진화의 원동력을 자연도태라고 주장했다. 자연환경에 보다 적합한 개체들이 살아남아 계속 자손을 남기면서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는 이론이다. 우장춘은 서로 다른 종이 자연상태에서 교잡해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이론을 남기게 된 최초의 1인이 된 것이다. 그 증거는 유채이다. 

 

7.  조선인 천재 과학자의 탄생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이 이뤄졌고 종의 합성 이론은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우장춘의 결과물은 학문적 그 이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종이 만나 화합을 이루는 것도 의미 있다,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가 모두 가치 있다는 철학적인 의미까지도 얻게 되고 바다 건너 한국까지 그 소식이 전해진다. 

 

8.

그런데 해가 넘어가도록 16년째 만년 하위직 신세인 우장춘 박사, 이유는 하나였다. 조 선 이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를 흔들었던 그 박사논문에도 우장춘의 우라는 한국 성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감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민간종묘회사로 떠난 우장춘, 초대 연구 농장장과 사택을 제공받으며 최고로 대우를 받으며 새로운 농업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직 후 9년이 되던 해,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다. 

 

9. 

해방 이후 일본이 철수하면서 종사 산업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가지고 가버렸고 농업 기술자들도 모두 한국을 떠났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종자조차 구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우장춘이 한국에 오기를 희망했다. 우장춘이 한국에만 온다면 종자 산업의 발전과 후배 기술자 양성까지도 꿈을 꿀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 친일파의 자식과 함께 할 수 없다며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10.

한국의 연락을 받은 우장춘 박사. 당시 우장춘 박사의 자녀는 6명으로 모두 반대를 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한국에 가기로 한다. 

 

11.

우장춘은 수용소로 제 발로 찾아간다. 이 수용소는 불법 체류자와 밀입국자의 수용과 강제송환을 담당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말이 수용소이지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누구나 쉽게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12.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 오게 된다. 우박사의 짐가방에는 무엇이 들려있었을까?

당시 한국 정부는 한국행을 택한 우박사에게 보낸 사례금은 100만 원으로 당시 공무원의 1년 치 연봉이었다. 

일본에 남을 가족들에게 주라고 준 돈이지만 우 박사는 그 돈으로 씨앗을 구입해서 들어온 것이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살아온 숨은 애국자이다. 그 후 각계각층에서 환영인사가 왔고 우장춘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서 일본인에게 뒤떨어지지 않게 노력을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한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가슴이 저미는 대답이다.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큰 무게감이 그에게 얼마나 큰지,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며 살겠다는 헌신적인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13.

한국에 들어온 우장춘 박사는 농촌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농촌투어를 가장 먼저 진행했다. 하지만 입국한 지 두 달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한다. 다행히 우장춘 박사가 있었던 부산까지는 북한군이 내려오지 않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일본으로 도망을 쳤지만 우장춘 박사는 끝내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부족한 물자와 논을 팔아가며 연구를 개발했다.  배추, 귤, 감자 등 지역과 기후에 맞게끔 품종 개발에 힘을 썼다.

 

14.

그런 나날이 지속되던 중, 외교적인 상황이 좋지 않았던 때 일본에 계신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 당시 출국을 금지시켰고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보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한일관계로 인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우장춘 박사의 슬픔을 작게나마 넋을 기릴 수 있게 작은 재단을 마련했고 이 소식은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후원금이 들어왔다. 우장춘 박사는 그 후원금으로 연구소 근처에 땅을 사고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그 우물은 극심한 가뭄을 해소했다.

 

15.

그렇게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종자에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우 박사는 병상에 눕게 된다. 당시 이 작농, 1년에 두 번 농사를 지을 수 있게끔 개발을 몰두하던 때이다. 입원 후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정부는 우박사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 나라의 권위와 명성을 널리 떨친 사람에게 주는 포장을 주고자 했다. 이 문자포장은 건국이례 두 번째로 주어지는 포상이었다.

그 포상을 우 박사는 병상에 누워서 받았다. 그로부터 3일 후 1959년 8월 10일 우장춘 박사는 세상을 떠나셨다. 못 다 이룬 벼농사를 이뤄달라는 말씀과 함께.

한국에 온 지 9년 5개월 만이었다. 아버지 나라의 뼈를 묻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 

 

 

출처

 

[다시보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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