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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3월 9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C-123기 추락 사건

by 영화좋아합니다 2023.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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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m-movie.com

 

 

내용

1. 

1982년 2월 5일 제주도 한라산의 어리목 관리소, 다음날 새벽 청와대 경호팀의 한라산 등반을 통보받는다. 당시 한라산은 폭설 수준으로 눈에 쌓여서 걱정이 됐다. 그날 밤 11시부터 양 씨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전화를 받게 된다. 도청, 경찰, 군부대 등에서 온 전화였다. 양송남 씨는 엄청난 윗분들이 오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새벽 3시 약속된 장소에 서있었던 양승남 씨, 군부대 차량이 오고 분위기는 어두웠다. 경찰과 군인들이 탄 차량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했다. 이전 수행과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였다. 트럭이 도착한 곳은 초등학교 도서관이다. 그 운동장에는 백여 명의 군인들이 가득했다. 군인 장교는 한라산에 잘 아는 양송남 씨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라산 등산로와 시간 등을 안내해 줬다. 코스 설명이 끝나고 곧바로 군인들은 산으로 향했고 여러 갈래의 코스로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2. 

하지만 청와대 직원들은 오지 않았고 군인들과 관음사 코스로 등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전 대학 산악부 학생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최소령은 양씨에게 대학생들에게 비행기 추락 물체나 증거물을 보게 되면 전해 달라는 말을 부탁한다. 청와대 경호팀의 등산이 아닌 추락한 비행기 수색현장이었다.

 

양 씨는 의문을 가졌다. 비행기 추락 현장이 왜 그리 은밀했어야 하는지. 온 산이 하얗게 뒤덥혀 있고 제대로 된 등산 장비가 없는 군인들의 등산 속도는 오르지 않았다. 7시간 수색 후 탐라계곡의 무전을 듣고 3시간을 걸어 탐라계곡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빽빽해야 할 나무들이 모두 꺽여있었고 그 흔적을 따라 구겨진 비행기의 흔적 찾았다. 비행기는 종이처럼 구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상했다. 비행기는 국방색이었다. 국박색의 군용기였다. C-123으로 월남전에서 병력 수송 및 고엽제 살포에 주로 사용되었던 기종이다. 국군에서는 물자 수송, 병력 이동에 주로 사용되었다. 

 

3. 

사고 수송기가 추락한 지점은 한라산 중턱 해발 1,060m 개미목 부근이었다. 좁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이다. 이 비행기는 한라산 북쪽을 비행하다가 능선에 충돌한 것으로 추정했다. 양씨는 부서진 기체 주변으로 다가갔다. 하얀 눈 사이로 불탄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최소령은 군인들을 집합시켜 놓고 시신의 잔해를 수습하기 시작한다. 사고기 탑승 군인 53명으로 전원 사망했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철수단계에 다다른다. 철수 단계에서 최소령은 양 씨를 부른다. 이 현장을 본 민간인은 양 씨뿐이니 혼자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한다. 

 

4. 

사고 현장을 찾고 있었던 제주신문 서재철기자가 산을 찾았다. 사고 당일 텔레타이프(수신신호가 인쇄 기록되는 자동기기로 당시 연합통신 등에서 속보를 알리는 데 사용했다)가 울렸다. 82년 당시에는 속보를 전하는 텔레파이프가 비상 알림 벨이었다. 속보 내용은 훈련 중이던 추자도 해역에 군용기가 추락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당국도 정확한 사고 위치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기자의 촉은 추자도해역이 아니라 제주도였다. 82년 군사정권 당시 취재가 허락될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사고 현장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무작정 한라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서기자는 산악회 회원이었고 해박한 지식과 신체적 능력을 활용해서 사고 현장을 발견하게 된다. 

 

5. 

다음 날 새벽 서기자는 다시 등산을 한다. 군인들이 다시 현장에 나타나기 전에 현장에 먼저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기자는 빨리 현장을 찍고 현장을 벗어나야 했다. 순식간에 36장짜리 흑백필름 4통을 모두 사용했다. 그리고 서둘러서 옷을 뒤집어 입었다. 기자 신분이 들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인들과 마주친다. 군인은 서기자에게 말한다. 어떻게 왔냐며, 서기자는 등산을 왔다 잠깐 쉬었다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무사히 하산을 하고 회사에 들어가니 사장이 필름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이미 윗선에서 조치가 된 상태였고 금단의 영역인 군부대 내 사고였다. 서기자는 어쩔 수 없이 필름 3통을 건넨다. 남은 필름 1개는 숨겼다. 서기자는 언젠가는 이 필름을 꼭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위해서.

 

6. 

얼마 후에 기사가 났다. 사건 발생 3일 후 출처는 동아일보였다. 제주도 지역에서 작전 훈련 중이던 수송기는 추락했고, 원인은 갑작스러운 이상 상황이며 탑승객 53명 전원의 사망사고였다. 모든 신문기사는 국방부의 전문을 그대로 받아 쓴 기사였다. 단 한 장의 현장 사진도 없었다. 지금처럼 정권의 의도만을 반영한 나팔수의 역할이었다. 

 

7. 

사고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이상했다. 제주도가 아닌 강원도로 훈련을 간 동생이 제주도 훈련에서 사망한 것이고 가족들에게 제대로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고 TV 속보로 전해진 그 한 줄이 전부였다.

 

유가족들은 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유는 사망한 장병들은 아주 특별한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탑승 군인들은 모두 대한민국 특전자 대원들 중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인원들로만 선발된 최정예 부대였다. 특수작전사령부, 대한민국 최정예 부대. 707 특수임무부대대원들, 공군 6명을 제외하고는 47명이 707 특임대원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수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비행기 추락을 예측했다면 모두 탈출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훈련 상황임에도 낙하산이 없었다. 유가족들은 어떤 훈련을 받았길에 사망을 했는지 여러 번 물었지만 국방부는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8. 

그리고 유가족들은 문서를 하나 찾는다. 문서에는 비행기가 추락 후 훈련명을 변경한다는 지시 사항이었다. 사령과는 왜 사고 난 이후 침투작전명을 변경한 것일까? 이 날의 진실을 알만한 사람은 707 특임대 요원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사고가 있던 순직한 대원들과 함께 출동하고 군용기에만 탑승하지 않았던 그 군인을 찾았다. 바로 이 원 사였다.  

 

9. 

당시 707 특임대원들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한 군용기는 총 8대였다. 추락한 군용기는 4호기. 당시 제주도에서 몰래 실시해야 했던 작전이 있었다. 작전명은 봉황새 1호 작전. 봉황새는 청와대의 마스코트이다. 

 

10. 

당시 전두환이 제주도 방문을 위해 진행했던 경호작전이다. 전두환의 경호 작전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사고로 인해 추락을 한 것이다. 당초 대침투작전이라는 건 없었다. 전두환의 경호를 위해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부정적 요소를 없애기 위해 언론을 통제했다.

 

11. 

당시 군부대 책임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은 기상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고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은 처음이라 청와대에 두 번이나 기상상황이 좋지 않음을 건의했지만 위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이륙을 했다. 출발지인 서울과 도착지인 제주도는 며칠 째 폭설로 기상상황이 좋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군용기를 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2. 

전두환은 일반 군인이 아닌 최정예 부대가 필요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은 장세동으로 전두환의 충견이었다. 전두환의 마음만이 가장 최우선이라고 여기는 인간이었다. 

 

13.

당시 사고 이후 전두환은 말했다.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냐,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국가가 아닌 개인을 위해 발생한 사건임에도 무책임한 발언을 내뱉는다.

 

14. 

모든 고통은 유가족들의 몫이었다. 영결식 때는 이미 화장이 끝난 상황이었고 내 가족의 마지막 길조차 먼발치에서 밖에 볼 수 없었다. 

 

15.

1982년 5월, 사고 100일이 지난 후 유가족 중 한 사람은 유가족 중 유일하게 제주도에 거주 중이었다. 삼엄한 경계로 인해 군인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사고 현장을 찾는다. 도착했을 때 그 현장에는 군용기와 사고 잔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100일이 지나도록 현장 수습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모두 사고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16.

땅과 다른 흙색깔이 있는 곳이 있었고 유가족들은 군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땅을 팠다. 땅속에서는 시신의 일부가 나온다. 날이 추워서 부패되지 않은 사채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군화가 묶인 다리 일부와, 베레모가 써진 두골 일부 등 사체 잔해들이 발견된다. 고인과 유족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었던 것이다. 눈에 띄는 사체만 수습했을 뿐 구체적인 잔해는 수습을 하지 않았다. 석 달 전 멀리서 지켜만 봤던 영결식의 유골함, 과연 그 유골함에 유골이 있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유족들은 틈이 나는 대로 산에 올라 직접 사체를 수습했다. 

 

17.

1987년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고 영원할 것 같았던 독재정권의 끝이 보였다. 1988년 유족들은 유족회를 만들어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청하며 국가 차원에서 시신 수습을 요구했다. 그 무렵 제주도에서는 제주신문 서재철 기자가 꽁꽁 감춰두었던 필름 한 통을 꺼내서 인화를 했다. 그리고 신문에 실었다. 

 

18.

하지만 그동안 은폐되었던 사건들이 많았던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회에 올린 5번의 탄원서도 모두 답변이 없었다. 유가족은 멈추지 않았다. 전두환, 전 특전사령관 박희도, 전 국방부장관 주영복, 전 육군참모총장 이희근을 고소한다. 

1992년 12월 나온 수사 결과는 무협의, 직권남용은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됐다. 지금까지 사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021년 전두환은 사망 전까지 언급하지 않았고 2018년도 박희도는 오래돼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 

한라산  중턱에 충혼비가 세워진다. 한라산 관음사휴게소 내에 위치해 있고 사고 현장에서 수습한 수송기 잔해들을 함께 보관해 두었다. 그 충혼비 비석에 새겨진 시는 박희도가 지은 시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박희도이다.

진실은 충혼비 뒷면에 적혀있다. 2015녀 대침투 작전이 아닌 대통령 경호작전 중으로 변경되었고 이 한 줄 바꾸는 것이 33년이 걸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서 이룰 수 있는 결실이었다.

 

 

 

출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C-123기 추락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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