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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현대 정주영 회장, 소 1001마리와 함께한 판문점 방문기

by 영화좋아합니다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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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보기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을 말한다 - 소 1001마리를 이끄는 사나이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농업부터 시작하여 현재는 현대그룹을 이끄는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특별한 경영 방식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바로 "소 1001마리"를 이용한 경영 방식입니다. 그는 이 방식을 통해 수많은 기업가들의 경영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은 소 1001마리를 이끄는 사나이로 떠오르는 이유는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실천력, 그리고 경영 능력 때문입니다. 그의 경영 방식과 철학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 방식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은 기업 경영에 있어서 항상 도전과 혁신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소 1001마리를 이용한 경영 방식을 통해 그의 경영 철학을 대변합니다. 이 방식은 경영 방법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 자원 관리 등의 문제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혁신적이었습니다.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 철학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은 "인간 중심 경영"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직원들을 최우선으로 생각

현대 정주영 회장과 소 1001마리가 함께한 판문점 방문기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현대 그룹 창업자이자 초대 회장인 정주영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가인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과 산업화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HDC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을 창업하였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또한, 정주영 회장은 다양한 훈장을 받았습니다. 1987년 한국경영대상, 198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 훈장, 1998년 노르웨이 왕실 훈장, 2001년 만해상 평화상 추서, 2008년 DMZ 평화상 대상 추서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또한,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기업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생전 대한민국 최고 부자였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그가 남긴 기업과 그의 이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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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82년 4월 충남서산 이미지

1. 

1982년 4월 충남 서산, 간척사업 현장 (호수나 바다를 육지로 만들어 농업 용지, 공업 용지로 조성하는 토목공사)은 현대가에서 빠질 수 없는 사업이다. 포브스 선정 세계 9위 부자,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명언을 남긴 정주영 회장의 유년시절과 아버지의 일생이 담긴 장소였다.

 

정 회장은 1915년 빈농 집안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매일 새벽 4시면 아버지가 깨웠다. 그렇게 긴 하루는 시작되었고 그 하루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한 농사일이었다. 어린 주영의 유년시절 기억은 농사일뿐이었다. 

 

2. 

198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 후 시작한 햇볕정책이 시작된다. 이는 남부 경제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1,000만 달러 이하로 규제해 오던 북한에 대한 투자 규모 제한을 완전히 폐지하기로 한다. 전적으로 민간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정주영 회장은 지체 없이 대북사업에 진출한다. 그 시작으로는 소떼가 있었다. 남북관계의 전무후무한 역사, 통일에 염원을 짊어진 소가 줄지어서 방북을 한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정주영 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북한으로 향한다고 호언장담한다. 

 

3. 

1998년 6월 16일, 안전을 위해 호송차와 경찰차가 동원되었고 취재 열기 또한 어마무시했다. 판문점까지 가는 길이 모두 생중계가 되었다. 그리고 트럭이 지나는 길에는 실향민들이 함께 했다. 

 

4.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나뉘는 곳이다. 판문점에 들어선 정주영 회장은 중립국 감독위원회 사무소에 도착한다. 건물은 군사분계점을 가로질러 지어져 있어 들어가는 문은 남한이지만 나가는 문은 북한이 된다.

 

절대로 넘을 수 없었던 금지된 그 선을 정주영 회장은 두 발로 넘는다. 정주영 회장은 고향 쪽으로 향하니 반갑다고 말하고 북한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평양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5. 

메인이벤트 소떼의 이동도 시작된다. 소떼 트럭은 철사슬과 말뚝으로 막혀있던 비포장도로는 활짝 문이 열리고 그 길로 소떼 트럭은 평양에 도착한다. 사고 없이 마무리된 소떼 방북 이벤트.

 

6. 

북한에 간 정주영 회장은 공연관람과 금강산 관광과 북에 있었던 친척들을 만난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북에서의 일정은 7박 8일로 6월 23일 군사분계선을 걸어 다시 남으로 돌아온 정주영 회장. 정주영 회장은 갈 때보다 더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1998년 6월 22일 남북합의서

합의서 내용은 이렇다.

"6월 22일부로 합의한 금강산지구 관광개발사업과 관련하여 금강산관광개발 추진위원회를 열고 희망하는 대내외의 모든 개인 또는 단체들이 여기에 참가하도록 한다. 본 위원회 위원장직은 정주영 회장이 맡으며 본 위원회에 연락협의회를 두고 수시로 협의하면서 본 사업을 운영 추진하기로 한다."

 

7. 

금강산 관광에 물꼬가 터진 것이다. 2003년에는 금강산 육로관광이 시작되었다. 10년 동안 금강산을 방문했던 인원은 총 195만 명이었다. 모두 정주영 회장 덕분에 북한의 땅을 밟아본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개성공단 사업도 진행되었다. 남과 북이 함께 생산을 하는 사업으로 남한은 자본과 기술을 북한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2004년 12월 개성공단에서 완성되어 국내로 반입된 최조의 시제품은 냄비로 일명 통일냄비였다. 

 

8. 

1차 방북 후 석 달이 지난 무렵 폐사한 소의 문제가 제기된다. 북측은 폐사한 소를 부검해 본 결과 상식적이지 않게도 비닐과 밧줄이 나왔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북으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원인은 수송열이었다. 수송열은 소나 양에 발생하는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으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요인에 의한 발병이다. 

 

차를 처음 타 본 소들이 장시간 차량 탑승에 스트레스와 낯선 북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폐사한 것이었다. 

 

9. 

오해를 풀면서 소들의 2차 방북이 이어졌지만 언제든지 남북의 사이가 틀어질 수 있다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해수욕장에서 혼자 산책하던 남한 관광객의 사망 사건을 시작으로 금강산 관광은 중단된다.

 

이어 2016년 이후에는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개성공단 가동을 멈췄다.

 

10. 

육로로 금강산을 가던 그 시절도 남북이 합작해 만들었던 냄비공장도 지금은 너무 먼 과거의 일로 머물러 버린 현실이다.

하지만 2001년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을 때 북한 조문단은 장례식장을 찾았다. 전례 없던 최초의 일이었다. 정치적 상황과는 별게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던 때가 있었다. 

 

 

정주영에 대하여 말한다

 

유년시절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고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하다.

 

정주영은 공부를 잘했으나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가출을 반복하며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아버지의 소를 팔아 가출을 떠나고, 금화에 가서 일했다. 19살 때 인천항에서 일하면서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하여, 가게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변중석 여사와 결혼하였으며, 경일상회를 개업했지만 중일전쟁으로 인해 폐업해야 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년시절
출처 머니투데이

기업활동
  •  자동차 공장의 설립

1940년에 경성부에서 가장 큰 자동차 서비스 공장이 경영난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달도 채 지나지 않아 불에 타버렸고,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장도 1942년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 하여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광산은 문을 닫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때 이미 광산업을 인계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주영 회장은 피랍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그룹 로고
출처 현대그룹

  • 현대그룹 설립

정주영 회장은 1946년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현대자동차공업사[1]를 설립하였고, 이어 현대건설주식회사[2]와 현대자동차주식회사[3]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한국 전쟁 직후에는 현대건설이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는 일을 맡아 건설 분야에서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였으며, 이후에는 시멘트 공장 설립과 국내 건설업 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는 등 건설분야에서 성공적인 경영을 이어나갔습니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현대시멘트주식회사[4]를 설립하여 국내외 건설시장에서도 진출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현대그룹[5]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이어 중공업[6]에도 진출하였습니다.

 

 

사회활동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아랍 친선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냈고,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제13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또한, 1977년에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아프리카 친선협회의 회장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생전사진
출처 위키백과

정계입문

현대그룹 회장에서 물러나고 세종연구소 이사장으로 초빙된 후, 1992년 1월에 정치계에 입문하여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김동길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한·소 경제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입후보하여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김대중 정권 시기에는 방북을 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했지만,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3위로 패배한 후 김영삼 정권 아래서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1993년 초에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국회의원직도 사직하였으며,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했다. 

 

1996년에는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 중 한 사람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1994년에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소떼방북당시 실시간중계 모습이 담긴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방북과 금강산개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1998년 6월과 10월에는 소 1001마리를 북한으로 가져갔고, 이후 여러 차례 방북하여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하였습니다. 

 

현대 그룹의 명예회장인 정주영 회장은 1998년 소 1001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방문한 이후로 두 번째로 2018년 9월 18일에 다시 판문점을 방문하였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1998년 판문점 방문 시 소 1001마리를 끌고 강력한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이번 방문에서도 이전과 같이 평화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소 1001마리와 함께한 판문점 방문기를 남겼습니다.

이번 판문점 방문기를 통해 현대 그룹은 평화적인 세상을 꿈꾸는 인류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대북사업 추진을 위해 1999년 현대아산[7]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입니다. 이때 그는 원산과 평양을 둘러보며 자신의 고향인 통천도 방문하였습니다.

 

 

사망

정주영 명예회장은 2001년 3월 21일에 서울중앙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사망하였습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생전사진 2
출처 현대아산재단

사후

정주영의 공로와 업적은 그의 사후에도 여러 차례로 인정받았습니다.

2001년 5월에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 되었습니다. 이상훈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한국 경제의 발전과 세계 경제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한 대표적 기업인 현대그룹을 이끄는 명예회장 정주영 씨의 공로와 업적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수상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후 2006년 11월에는 미국 타임지(Time)에서 아시아의 영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아시아 지역에서 창조적인 업적을 이룬 인물에게 수여하는 상입니다. 또한 2008년에는 DMZ 평화상 대상[8]에 특별 추서되었습니다.

정주영의 업적과 공로는 그가 떠나기 전부터 이미 국내외에서 인정받았지만, 이후에도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여전히 크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출처

 

 

현대 제3차 소떼 방북 | 연합뉴스

현대가 1998년에 이어 2000년 8월 8일 세번째 소떼몰이 방북을 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남북정상회담 성공 축하로 소 500마리를, 평양 ...

www.yna.co.kr

 

 

남북정상회담 ‘만찬메뉴’에 담긴 김대중·노무현·정주영의 평화의지 - 시사위크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남북정상회담 만찬 메뉴가 24일 공개됐다. 메뉴의 주요 재료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관계된 것으로 마련했다. 한반도 평화와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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