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능/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22회 제주 4.3사건 현재진행중인 역사적 대학살

by 영화좋아합니다 2023. 4. 7.
300x250

미리 보기

제주 4.3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민간인의 대량 희생이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약 7년 7개월 동안 전개된 이 사건은 냉전 시대의 정치적 혼란과 극단주의가 얽힌 가운데 일어났으며, 그 후 여러 세대에 걸쳐 상처를 남겼습니다. 

 

현재까지도 진상 규명과 희생자 인정, 화해와 교훈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보고,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은 아픔과 함께 평화와 화해를 향한 노력들을 소개합니다. 이 포스트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보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발걸음을 되짚어보겠습니다.

 

 

내용

 

 

1.

1991년 12월 22일,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제주도, 당시 24세 은희 씨가 속해있는 탐사단은 잃어버린 마을을 찾기 위해 탐사활동 중이었다. 한 할아버지의 제보를 받고 다랑쉬오름 근처를 살피던 중 같은 탐사 단원인 동만이 신발 밑으로 뚫린 구멍을 찾았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것은 동굴이라 확신했다. 손전등을 비춰보니 굴 안에는 백골 시신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시신들이 한꺼번에 발견될만한 상황은 짐작이 가능하다. 굴 안에서는 어떤일이 벌어졌는지는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돌려야 한다.

 

2.

1947년 3월 1일, 제주 시내에 학교 운동장에서는 3.1절 기념 행사가 진행되었고 행사에 참여한 인원은 3만 명으로 당시 제주도의 전체 인원은 30만 명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건물 모퉁이를 말을 타고 돌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기마경찰은 멈추지 않았고 이를 본 사람들은 기마 경찰을 향해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졌고 경찰은 도민들을 향해 총을 쐈다. 8명의 부상과 6명이 사망했 그들은 기념행사를 보러 온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날의 총성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당시 제주도의 분위기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험악했다.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나워서 통치했던 시기로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가까워 일본인들 탄압이 심했다. 제주도민들은 해방 후 일본인이 돌아가면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기대와는 미군정은 친일 경찰을 다시 고용했다. 행정 편의와 치안을 책임지던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고용하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친일파 청산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게 미군정 하에서 친일 경찰은 다시 활개를 치고 이 상황에서 친일 경찰에 의해 무고한 시민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시민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그리고 경찰은 사과문이 아닌 성명서를 발표했다. 경찰관의 발포는 폭도를 선동하는 민중의 일부분이 있는 한 불가피한 일이었다며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거짓성명서였다.

 

3.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폭발했다. 기관, 학교, 회사 등이 참여한 총파업이 벌어졌다. 참여율은 95%에 달했다. 그리고 파업에 참여한 참가한 참가자들 2,000여명이 체포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산과 오름에 봉화가 켜졌다. 제주도 좌익 무장대가 경찰서를 습격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경찰과 우익인사, 친일 가족들이 사망했고 이 소식은 서울까지 흘러들어 간다.

 

4.

그리고 제주도민들은 5.10 총선거를 하지 않기 위해서 짐을 싸들고 산으로 향한다. 한 달 후인 5월 10일은 제1대 국회의원 총선거일로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제주도민들은 강력한 저항의 의미를 내보인 것이다. 원하지 않는 후보에게 투표를 하느니 투표를 거부하고 산으로 오르겠다는 의지였다.

 

남북통일 정부를 주장한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은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남한 단독선거인 5.10 총선거 출마를 거부했지만 기회주의자였던 이승만은 그 당시 유력 대통령 후보로 5.10 총선거는 대통령 당선에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그리 5.10 총선거 결과 제주도만이 과반투표율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모든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명명하며 제주도로 구축함을 보내 제주 해안선을 봉쇄한다. 그리고 육지에서 응원 경찰 수십 명을 파견하고 제주도민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5.

제주 4.3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주 4.3 사건은 시작만큼이나 전개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즈음 전염병처럼 제주도에는 '속솜허라이' 말이 전염병처럼 돌기 시작했다. 이는 조용히 해라라는 제주도 방언이었다. 당시 그 시절을 제주도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면 모두 기억하는 단어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 마을의 청년들이 사라졌고 젊은 청년들은 빨갱이와 폭도로 몰려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그 잔인함은 일제강점기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과 다르지 않았던 정권의 나팔수 당시 동아일보의 1948년 10월 20일 자 내용에 따르면, 과격분자를 숙청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쓰인다. '군은 천인공노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적 극열 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릐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며 만일 포고를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한마디로 마을에 없는 사람=산폭도=총살, 한마디로 정부가 국민을 죽이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이 작전명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대다수의 제주도민은 해안가가 아닌 중산간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 범위 내에서 안전할 제주도민은 많지 않았다.

 

6.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고 직후 계엄령을 선포한다. 계엄령은 대통령 고유 권한으로 해당 지역에 행정을 군대가 처리하며 민간인의 체포, 구금이 허용되는 행위이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군인과 경찰들이 들쑤시고 다니며 군인과 경찰 무장세력에 완전히 포위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은 서북 청년단을 투입시킨다. 서북 청년단은 이북 청년단으로 공산당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 남쪽으로 내려온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목표는 반공이었다. 이승만은 민간인에게 테러를 지시했다.

 

이승만은 훗날 있을 역사적 기록에도 대비했을 것이다. 제주 4.3 사건의 탓을 북한으로 돌리기 위함도 있었다. 

 

7.

제주 4.3 사건 마을별 피해 규모를 그래프로 그린 이미지
출처 SBS

제주 4.3 당시 마을별 피해 규모를 나타낸 그래프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희생이 없는 곳을 찾을 수 없다.

 

제주 4.3 사건 당시 사망자 숫자를 나타낸 그래프 이미지
출처 SBS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노형리 마을은 538명이 사망하였다. 마을마다 편차는 있지만 사망자가 없는 마을은 제주도 전체에 단 한 곳도 없었다. 

 

8.

이런 식의 학살이 이뤄진 시간은 1947년부터 1945년까지 무료 7년 7개월간 이어졌다. 공식 집계된 피해자는 15,000여 명이지만 신고 누락건까지 환산하면 실제 희생자는 3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 사람 9명 가운데 1명꼴로 사망한 것이다.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과 자료는 차마 눈으로 볼 수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법과 국가이지만 제주도민들에게만은 예외였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직접 나서서 자행한 끔찍한 폭력.

 

제주도민들은 그 날이후 그날의 기억에 대해서는 가족끼리도 감히 꺼내려하지 않는다. 이유는 연좌제.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민에게 연좌제로 협박을 했고 그렇게 역사는 쌓여갔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제주 4.3 사건.

 

9.

다시 1991년 12월 24일, 제주도로 돌아온다. 탐사대원이라고 했던 은희, 동만, 기삼은 4.3 연구소 소속 학생들로 은밀히 제주 4.3 사건에 대해 추적하는 단체였다. 동굴 속에서 발견된 백골 사체들의 증거영상을 촬영하고 속솜하게 백골 시신들의 원인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1991년만 혀도 4.3에 관련된 얘기들은 사회 전체적으로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10.

제보자였던 할아버지는 당시 다랑쉬 오름 동굴에서 살았으며 그 백골 시신들을 정리한 사람이었다. 제보자는 1948년 11월 토벌대를 피해 다랑쉬굴에 잠시 머물렀다. 힘든 와중에 함께 의지해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동굴 근처에서 군경 토벌대를 발견하게 되고 다른 동굴로 대피를 했다.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다랑쉬 굴로 향했지만 이미 굴로 향하는 길 자체는 불길에 휩싸여있었고 다랑쉬 굴로 들어가니 이미 그들은 숨을 쉬기 위해 땅에 코를 박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벽을 긁어 손톱이 빠진 채로 그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갔던 것이다. 

 

토벌대는 굴 근처에서 용변을 본 흔적과 냄새로 위치를 찾았고 굴 입구에 총을 쏘았고 아무도 나오지 않자 굴 입구에 짚으로 불을 피웠다. 그리고 굴 입구를 돌로 막고 질식사시켰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결말이다. 토벌대는 제주도민들을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피신한 종달리와 인근 마을의 사람들, 괴롭혀서 도망치게 만들고 도망가면 죽이는 이승만 정권의 친일 경찰과 토벌대들. 

 

11.

유가족 인터뷰 내용 중 광언 씨가 나온다. 그는 다랑쉬 오름 굴에서 백골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보도가 나오고 얼마 후 30년간 복무했던 직업군인을 그만둔다. 정년을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제주 4.3 사건의 유가족으로 아버지의 사망 사건만 가볍게 알고 있었을 뿐 그 원인가 대상이 누구였는 지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만큼 4.3 사건은 제주도민들에게 감히 꺼낼 수 없는 상처라는 걸 알 수 있다.

 

유가족 광언 씨는 아버지가 본인과 같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에게 비참하고 끔찍하게 살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국가를 위해 충성을 한 것인지, 조상들에게 효도를 한 것인지, 불효를 한 것인지 본인 스스로가 죄인인 된 것 같은 심정이라고 전했다.

 

12.

그 후 제주 4.3 사건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다랑쉬굴 자체는 제주 4.3 학살의 결정적인 증거이자 역사였다. 유가족은 유해 수습과 진상 조사를 원했지만 당시 계좌읍장과 구좌 파출소장은 다랑쉬굴 발굴 및 출입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유골은 화장하기로 결정했다고 전달받았는데 당시만 하도 제주도에서 화장을 한다는 건 큰 결례였다. 당

 

시 경찰 측에서는 유족 대표의 도장만 빌려서 마음대로 화장을 결정하며 사기를 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4.3 사건은 장시간 이어졌고 당시 가해자였던 제주 친일경찰들은 지금도 친일경찰일 것이다. 제주도 친일 경찰들은 평생 동안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며 낙인을 찍었고 유족들은 그걸 또 겪을까 봐 추가적인 반말은 하지 못했다.

 

화장터에서도 오직 술잔 11개만 놓인 장례식장은 초라했다. 의견하나 피력할 수 없는 유가족들이 무기력해 보였고 안타까웠다. 유가족들은 장례식장에서 조차 목놓아 울지도 화를 내지도 못 했다. 그저 숨죽여서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그렇게 화장된 유골은 한 곳에 모아 바다에 뿌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제주도 친일 경찰들이 원하는 대로 이뤄진 것이다.

 

13. 

보는 이들은 숨죽여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1999년 7년 만에 4.3 특별법이 통과됐고 특별법을 토대로 4.3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2003년 국가 원수 최초로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했다. 무려 56년 만에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

 

공식석상에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되었던 잘못에 대해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를 전했고 유가족 4만 명은 눈물을 흘렸다.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온 유가족들에게는 이보다 큰 위안은 없었을 것이다. 43년간 산폭도라 불리며 빨갱이의 가족이라 불리었던 세월이 길었지만 유가족이라는 말 한마디에 그 시간들이 위안받는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4.3 평화공원을 찾고 있다. 하지만 4.3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재까지도 다랑쉬굴에는 돌로 막혀있다. 

 

 

사건

제주4.3 사건 개요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개요

제주 4.3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소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극우단체의 과잉진압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꼽힙니다.

 

 

제주 4.3사건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발단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3.1절 경찰이 아이를 치고, 이에 항의하는 일반 시민들에게 발포한 사건이 시작점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건 이후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어 국군, 경찰, 극우 단체들이 반란 세력 및 무고한 민간인들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제주 4.3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이 경찰의 과잉진압에서 시작되었다는 정보는 여러 역사 기록과 연구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역사학자들의 연구, 정부의 기록,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를 통해 제주 4.3 사건이 경찰의 과잉진압과 이후의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면서 발생한 대규모 소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4.3 전야까지

정치적 긴장 상태: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좌파 세력 간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해집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남로당과 빨치산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정부와 미군 당국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과도한 진압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무장봉기와 사태 악화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전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키며,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됩니다. 이에 국군과 경찰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을 펼칩니다.

4.3 사건 발생 전야: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 봉기 세력과 국군, 경찰,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이 충돌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도 많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약 7년 7개월 동안 전개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발생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KBS


무장 봉기와 진압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 당국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국군과 경찰이 무고한 시민들에게도 과잉진압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서북청년단의 활동: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단은 반란 세력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무장 테러와 진압 활동을 벌여 시민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을 대치와 혼란: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마을을 장악하고, 밤에는 봉기 세력들이 점령하기를 반복하는 상황이 지속되어, 제주도 전역에서 불안과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대량 학살과 인권 침해: 반란 세력뿐만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들에게도 과도한 폭력이 가해지며, 대량 학살과 인권 침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가족을 잃었으며, 이들의 상처는 여러 세대에 걸쳐 상속되었습니다.

정부의 진상 조사와 사과 (2000년대): 2000년대에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시작합니다.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와 보상을 실시하며, 이 사건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습니다.

 

출처 TVN

사건 이후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전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무장봉기를 벌이게 되면서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이후 국군, 경찰, 극우 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이 반란 세력과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구체적인 발단과 진행 과정은 제주도민과 전문가들의 증언, 연구 논문, 정부의 기록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조사되었습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 및 희생자들에 대한 공식 사과와 보상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과 정치적 갈등이 이 사건의 주요 원인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출처 KBS

4.3 사건 이후 현재까지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진상 조사와 희생자 인정: 2000년대 들어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시작합니다. 수많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인정되었으며, 정부는 이들에게 공식 사과와 보상을 실시했습니다.

- 기록 및 연구 활동: 제주 4.3 사건에 대한 연구와 기록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제주 4.3 평화기념물 관련 시설에서는 이 사건을 다루는 전시와 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학계와 시민단체들이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가해자 처벌: 제주 4.3 사건 당시 가해자들 중 일부는 처벌되었으나, 많은 가해자들이 처벌에서 면해졌거나 신원이 확인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한 정의 찾기와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난 관계로 구체적인 가해자 처벌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화해와 교훈: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들과 유족들, 그리고 당시 가해자들과 그 후손들 사이에서 화해와 상처 치유를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그 후 여러 세대에 걸쳐 아픔을 남겼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에서는 진상 규명, 희생자 인정, 화해와 교훈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제주 4.3 사건 - 나무위키

※ 학살 및 폭력행위에 관여한 경우 ★ 표시 민주화 이후,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추모와 진상 규명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1989년 4월 3일,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제

namu.wiki

 

출처 유튜브

 

 

출처 KBS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