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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정태수 회장과 한보그룹, 그들의 성과와 고난

by 영화좋아합니다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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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정태수 회장과 한보그룹의 성과와 고난에 대해 알아보세요. 한국 기업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태수 회장과 한보그룹이 겪은 역경과 이를 극복한 과정을 살펴보세요.

한국 기업계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인 꼬꼬무의 정태수 회장과 한보그룹은 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이 겪은 고난과 성과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겪은 역경과 이를 극복한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꼬꼬무와 한보그룹은 산업 전반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국내 기업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을 이루기까지 그들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들의 성과와 고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세요.

 

 

내용

출처 동아일보

1.

1960년대 종로 5가 뒷골목, 오전 9시만 되면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는 여관이 있다. 이 줄은 여관을 지나서 여관 안채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운학, 일명 백 선생으로 불리며 그는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관상전문가였다. 그의 대표적인 명성 중 하나는 1961년 1월 백운학을 찾아온 김종필을 향해 5.16 군사정변이 성공한다고 말했던 사건이 있다. 당시 백운학은 김종필을 처음 본 상황이었고 김종필이 방에 들어오기 전 마루에서 김종필을 보자마자 성공한다며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 백운학에게 1969년 허름한 행색의 태수씨가 여관을 향했고 그를 본 백운학은 당시 공무원이었던 태수 씨를 향해 공무원은 그만두고 당장 사업을 하라고 소리치며 대한민국 첫째, 둘째 갈 부자가 될 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태수 씨는 반문했다. 그가 돌봐야 할 아이들이 많고 투자자금조차 없다고.

 

그리고 다음해부터 3년간 매년 신년운세를 핑계로 방문했고 그때마다 백 선생은 소리치며 아직도 그만두지 않았냐고 닦달을 했다. 백 선생은 태수 씨에게 사업 방향까지 제시한다. 태수 씨는 토의 기운이 강해서 흙을 만지면 큰 부자가 될 상이라고 말했다.

 

 

2.

태수씨의 첫 사업 아이템은 광석이었다.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돌멩이를 주우러 다녔고 일제 때 폐광된 광산이 저렴하게 매물로 나왔고 태수 씨는 바로 구입을 했다. 그리고 전재산이었던 9평짜리 집을 담보대출을 받았고 주위 친구들에게 투자금을 받아 당시 천만원정도 되는 돈으로 부동산 투자를 시작한다. 위치는 서울 구로동으로 1,200평 부지를 매입한다. 시작부터 올인한 태수 씨. 그리고 세무서에 사표를 제출한다. 그 나이는 52세였다. 

 

그는 40대 후반 말단 공무원에서 재벌 총수까지 맨주먹의 신화를 쓴다. 그는 그룹 계열사 22개, 매출 5조 4천억, 전세계 재벌 총수 14위까지 올랐었던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었다.

 

 

3.

태수 씨는 구로동에 구입한 토지에 180세대 저층 아파트를 짓고 완판 된다. 대출과 투자금을 모두 갚고도 수 천만 원의 수익을 남긴다. 그리고 이어서 신림동에 건설한 미도아파트의 분양 경쟁률은 10:1로 연이어 대박을 터트린다. 당시 순이익만 20억으로 현재가치로는 180억이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4년이었다.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오른 듯한 그의 운수 좋은 나날이었다.

 

 

4. 

그리고 가장 처음 태수 씨가 사들인 폐광산도 기다렸다는 듯이 행운이 터진다. 그 광산은 몰리브덴이 나오는 광산이였고 몰리브덴(Mo)은 철(Fe)과 만나면 그 성질이 강해져서 탱크, 미사일 등 군수품 제조에 활용되었다. 태수씨가 광산을 인수할 시기에는 철강 경기 위축으로 몰리브덴 수요가 감소했던 시기였고 그 후로 해외 몰리브덴 생산지의 폐광으로 몰리브덴은 매우 희소해졌다. 그리고 70년대 말부터 몰리브덴의 수요가 늘어나 10배 이상의 가치를 보였다. 태수 씨의 기운은 하늘이 돕고 신이 거든다는 '천우신조'였다. 

 

 

5.

그리고 태수씨의 다음 계획은 강남이었다. 당시 1970년대에는 서울 인구 급증에 따른 과밀 해소를 위한 영동지구 주택 건립이 시행되었는데 태수 씨는 강남땅에 인생을 걸어보기로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물과 바람의 기운이 모이는 대치동. 바로 은마아파트였다. 은마아파트는 현재까지도 재건축 시장의 뜨거운 감자이다. 당시 대치동은 비만 내리면 빈번하게 물에 잠기는 지역이었지만 정태수 회장은 7만 2천 평이 넘는 토지를 매입하고 4천 세대가 넘는 규모였다. 

 

당시 대세는 소형 평수의 서민 맞춤 아파트가 대세였지만 은마아파트의 전략은 달랐다. 30평대 넓은 면적과 승강기를 설치해 현대식 시설을 갖춘 24층 프리미엄 아파트. 당시로서는 럭셔리 요즘으로는 하이엔드 브랜드인 것이다.

 

 

6.

하지만 1978년 8.8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이 발표된다. 당시 투기 심리를 공부한 복부인들 때문에 부동산 규제를 강화하고 세금을 인상하는 정책안이 발표된 것이다. 그리고 은마아파트는 청약 미달과 계약 해지자가 속출했다. 그로 인해 자금난이 시작되고 결국 부도 위기까지 왔다. 고급화 전략에 역대급 자본이 투입된 사업인 만큼 정태수 회장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의 예언대로라면 정 회장은 대한민국에서 첫째, 둘째 갈 부자가 될 상이었다. 

 

 

7.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오일쇼크가 발생한다. 1970년대 말, 중동 산유국의 석유 수출 중단 조치로 유가 폭등과 세계 경제 혼란 사태를 야기한 사건이다. 1980년대 물가상승률은 약 30% 인상되었다. 정 회장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가가 상승하면 화폐가치가 하락하니 믿을 건 땅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사교육의 성지인 대치동의 수요가 몰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강북에 몰려있던 명문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투자 열기와 명문고 이전 조치로 인해 미분양 상태였던 은마아파트는 불티나게 팔린다. 교육 열리 오일쇼크를 이기는 나라이기에 가능했다.

 

 

8.

정태수 회장은 은마아파트 공사 투자금은 20억이었고 수익금은 1,350억이었다. 1980년대 1,350억은 지금의 가치로는 6900억이었다. 매일같이 20~30억씩 현금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사업 시작 6년 만에 천억 원대 재벌이 된다. 

 

 

9.

정 회장의 유명한 어록이 있다. '사업의 90%는 운이다' 

 

그리고 그 운은 이어진다. 1984년 중견 기업이었던 금오 철강 회사를 인수한다. 인수 시점엔 재고만 쌓여 있었던 철강품들이 인수를 하자마자 국내 건설경기가 호황을 시작한다. 중국 수출길이 열리고 아시안 게임, 올림픽 게임 등 해외 수출과 국내 이벤트가 연이어 터진다. 인수 당시 쌓여있던 재고 60만 톤이 2개월 만에 완판을 한다. 

 

건설에 이어 철강 특수에도 성공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건설, 철강, 관광개발, 학원, 골프장개발 등 한보그룹으로 성장한다. 국세청이 발표한 1983년 귀속종합소득세 신고 상황에 따르면 82년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은 현대 그룹의 정주영 회장으로 16억 2,700원을 신고했고 정태수 회장은 81년 100위 안에도 들지 못했지만 82년도에는 11위로 올랐다. 그리고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은 59위, 이건희는 51위를 차지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10.

그럼에도 한보그룹의 본사는 은마아파트 상가에 있었다. 정태수 회장의 철학은 '목수가 본인 집을 지으면 망한다'는 말이 있었고 은마아파트 땅의 기운이 매우 좋았기에 이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본가도 다르지 않았다. 안방이 아닌 문간방이 기운에 좋다고 여겨 문간방 생활을 할 정도로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정태수 회장이 역술경영을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정태수 회장의 역술인들에 대한 믿음을 강했다. 종로 백 선생이 관상전문가였다면 부산 박도사를 통해 사주명리학을 보았다고 한다. 삼성 이병철 회장과 포항제철 창립자인 박태준 회장 등 부산 박도사를 거쳐가지 않은 정, 재계 인사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부산 박도 사는 3년간 한보그룹의 고문 역할을 했고 투자, 땅 매입 등 그룹의 큰일은 역술인과 함께 했다. 하지만 부산 박도사와의 연은 길지 않았다. 박도사는 환갑을 넘겼을 때부터는 그 운이 다한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태수 회장은 기업인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 대한하키협회 회장, 여당 재정위원을 맡으며 돈과 명예 명성까지 모두 정점을 찍었다. 부동산, 철강뿐만 아니라 정보통신, 제약, 관광, 신용금고 등 사업은 모두 성공을 했고 어느덧 계열사는 22개까지 확장했다. 

 

역술인이 경고한 나이가 지났음에도 정 회장의 운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정태수 회장의 나이 73세였던 1996년. 한보그룹은 재계 14위에 등극한다. 

 

 

11.

그리고 정태수 회장의 운이 이어진 이유는 사과상자 덕분이었다. 정태수 회장은 사과 상자는 검은돈의 상징으로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정 회장은 서울 한 호텔의 객실을 장기로 빌려서 그곳에서만 로비 활동을 진행했던 것이다. 정태수 회장은 역술가의 믿음에 이어서 돈의 힘을 믿었던 것이다. 

 

당시 그린벨트는 모두 한보의 땅이라는 말이 있었다. 한보가 그린벨트를 사면 건물이 들어서고 그 앞에는 고속도로가 생긴다는 공식이 있을 정도였다.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은 개발 정보를 제공하고 허가를 승인해 주고 다른 기업들과 출발선상부터 달랐다. 게임으로 치면 한보그룹의 치트키였다. 때문에 하는 사업마다 성공을 했던 것이었다.

 

정 회장은 원대한 꿈이 있었다. 철강재벌. 하지만 토지가 제한적이 기고 간척사업을 희망했고 정부는 승인했다. 그리고 한보그룹은 충남 당진 앞바다에 여의도 규모의 면적을 간척 사업을 진행한다. 

 

12.

그리고 정태수 회장의 꿈의 철강소에는 황무지 같은 현장에 3천여 명이 넘는 직원들이 투입된다. 1990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1995년 공사는 마무리된다. 시설 일부가 완공되고 꿈의 제철소는 가동된다.

 

하지만 공장 가동이 된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던 1997년 1월 23일, 한보 철강은 부도가 난다. 바로 전날까지도 회사 내부에서도 부도에 대한 언급이나 분위기는 없었다.

 

당진에 지어진 제철소는 모래 위에 빚으로 빚은 꿈의 제철소였다. 대규모 사업에는 대출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당시 한보철강의 자기 자본은 900억 원이었지만 5조 7000억 원의 대출을 진행했던 것이다. 정태수 회장의 뇌물을 받은 은행장들이 상상이상으로 대출을 진행했던 것이다. 당시 한 지점에서만 발행했던 대출금은 1천억 원이 넘었다.

 

부도 발생 후 일주일 후 정태수 회장은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회장들의 모습인 휠체어를 타고 마스크를 한 모습이었다. 이 모습도 정태수 회장의 모습이 최초였다.

 

그리고 정태수 회장은 모든 책임을 은행으로 돌린다. 추가적으로 대출을 내주지 않아서 부도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보의 대출금은 5조 7천억이었고 그중 제철소에 투입된 자금 2조 4천억 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3조 3천억 원의 행방은 다시 뇌물로 쓰였고 개인적인 사비로 쓰였다.

 

 

13.

그리고 추가적으로 밝혀진 사실, 한보그룹 계열사들의 부채 총합은 10조 원에 다다랐다. 무슨 수를 써도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사기, 횡령 등으로 정태수 회장은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한보그룹은 집단 부도가 발생한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횐위기의 신호탄은 한보그룹 사태였다. 해외로부터 좋은 투자처였던 우리나라는 90년대 중반부터 경제 불황이 이어져왔지만 세계 경기를 무시하고 무분별한 과잉 투자를 진행했다. 그런 한국 경제를 불신하던 외국자본에 불안감을 보탠 한보의 부도사태. 1997년 11월, 홍콩 페레그린 증권 보고서 따르면 한국은 더 이상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며 뱅크런을 제안했다.

 

그리고 국가부도사태를 막기 위해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IMF는 부실금융,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합법화와 직원 정리해고 조항을 넣는다. 

 

한보철강은 수차례의 걸친 해고 끝에 3,000명의 직원이 580명만 남게 된다. 2500명의 해고가 있는 게 아니라 1명의 해고가 2천 번이 있었다. 정 회장이 그리던 꿈의 제철소는 악의 제철소가 된 것이다.

줄지어서 삼미그룹, 기아그룹, 한라그룹 등 중소기업, 협력업체까지 줄줄이 도산을 하게 된다. 

 

 

14.

1997년 겨울은 우리 현대사에서는 끔찍하고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 그리고 7년을 표류해 왔던 한보철강의 매각 작업은 완료된다. 그리고 금 모으기 운동 등을 통해 3년 8개월 만에 IMF에서 빌린 자금을 모두 상환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부금은 다시 은행으로 돌아가서 은행 살리기에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2002년 정태수 회장은 특별사면을 받게 된다. 이유는 고령이며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이유였다. 복역 후 5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후 정태수 회장은 보유하고 있었던 대학교 자금을 횡령한 사실이 밝혀지고 다시 법정에 설 날을 기다리던 중 치료 명목으로 해외 출국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12년간 행방이 묘연했다.

 

2019년 함께 도피 중이던 정태수 회장의 막내아들이 체포된다. 그리고 정태수 회장은 남미 에콰도르에서 2018년에 사망했다. 해외에서도 그의 호화생활을 끊이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출국 승인 여부에도 의문이 든다. 

 

 

정태수 누구인가

출처 연합뉴스

 

기업활동

1974년 52세의 나이로 정태수 전 회장은 한보상사를 설립했습니다. 1976년에는 한보주택을 설립하고 서울 대치동에 은마아파트를 건설하여 큰 부를 축적했습니다. 1980년에는 한보철강을 설립하면서 한보그룹을 대기업 반열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1997년 1월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인해 한보철강은 부도를 맞게 되었고, 이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 위기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시 한보그룹은 약 5조 원의 대출을 받았으며, 부실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정관계 고위 인사 등에게 각종 로비를 하면서 이 같은 큰 규모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태수 전 회장은 한보그룹 부도 후 1997년 특정경제가중처벌법(특경법)상 횡령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2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습니다.

 

그러나 영동대학교 교비 72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다시 기소되어 2006년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 중 일본으로 치료 목적으로 출국하였고, 이후 12년간 행방이 불분명했습니다. 2009년 5월 법원은 정 전 회장이 불출석한 상태에서 재판을 계속 진행하여 징역 3년 6개월을 확정하였습니다.

 

한편, 정태수 전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 씨는 2019년 6월 파나마에서 검거되어 국내로 송환되었습니다. 그는 1998년 한보그룹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에서 322억 원의 주식 매각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정한근 씨는 국내 송환 후 아버지가 2018년 에콰도르에서 사망했다고 진술하였고, 에콰도르 당국이 발급한 정태수 전 회장의 사망증명서와 키르기스스탄 국적의 위조 여권, 화장된 유골함 등을 정 전 회장의 사망·장례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사망증명서에는 정 전 회장의 위조 여권에 기재된 이름과 같은 인물이 2018년 12월 1일 심정지로 숨졌다고 적혀있습니다. 이에 검찰은 정 전 회장이 실제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관련 증거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는 2019년 7월 4일 정한근 씨가 제출한 사망확인서 등 관련 서류가 진본이라는 사실을 에콰도르 정부로부터 확인받고, 정 전 회장이 2018년 12월 에콰도르에서 사망했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2018년 12월 에콰도르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정한근 씨는 도피 21년 만에 2019년 6월 파나마에서 검거되어 국내로 송환된 이후에 이 사실을 밝혔습니다.

 

한보그룹과 정태수의 평가

정태수 전 회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와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그의 기업인으로서의 업적은 인정받을 만한 부분이 있지만, 한보그룹의 부도와 이후의 사건들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이 더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한보그룹이 1997년 부도로 인해 한국의 금융위기를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한 정태수 전 회장은 정치권에 로비를 하여 무리한 대출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사회적 불신과 분노를 샀습니다.

정 전 회장이 감옥에서 특별사면을 받고 출소한 후에도 다시 횡령 혐의로 기소되었고, 일본으로 도피해 12년간 행방을 감췄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 대한 불신과 비난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결국, 정태수 전 회장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인식은 부도 및 무리한 대출, 재판 도중 도주 등의 부정적인 사건들로 인해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이 지배적입니다.

 

 

출처

 

한보그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보그룹은 대한민국의 기업이다. 정치권 로비를 통해 은행에서 무리하게 대출을 받으며 재계 서열 14위까지 오른 대기업이기도 하다. 1997년 1월 30일 부도 처리

ko.wikipedia.org

 

출처 KBS

 

 

출처 KBS

 

출처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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